본문 바로가기

보는 이야기

전쟁의 민낯 - 서부전선 이상없다(Netflix Ver.)

728x90
반응형
BIG

 

영화의 인트로는 옷으로 시작합니다. 군복이죠. 한 차례 참혹한 교전이 지나간 후 , 참호전에서 처참히 찢긴 시신을 향해 간부는 살아남은 병사에게 명령합니다. 군번줄 챙기고 상의를 벗기라고요. 뻘밭을 의심케 하는 참호의 진창에서 병사는 고깃덩이로 변한 사망자의 군번줄과 군복을 챙깁니다. 피와 진흙이 범벅된 옷들은 보자기에 싸여 기차에 실리고, 이내 세탁소로 향합니다. 핏빛으로 물든 빨랫물을 거쳐 수선을 마친 군복은 철 모르는 학도병 지원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이 영화의 백미는 처음부터 등장합니다.

 

'잘못 받은 것 같습니다. 제 이름이 아닌데요.'

 

'이 친구에겐 좀 작았던 것 같군. 늘 있는 일이지.'

 

징집관이 자연스러운 척 뗐던 이름표는 세탁과정에서 미처 제거되지 못한, 전장에서 사망한 병사의 이름표였습니다. 어린 학도병에게 죽은 병사가 입었던 군복을 입히고 싸우라고 내몬거죠. 전쟁의 이면을 시작부터 강렬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징집관들이나 학생들에게  조국에 영광을 바치라며 참전을 일갈하던 교장은 과연 전선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렇진 않았을 것입니다. 조국을 위한 일이라며 파리로 진군해 훈장을 받으라며 참전을 부추기던 어른들이 있었습니다. 그 어른은 과연 전쟁을 몰랐을까요. 그렇진 않았을 것입니다. 

 

영화는 현생에 강림한 지옥을 지리하게 보여줍니다. 딱히 스토리랄만한 것도 없습니다. 전쟁 한 가운데에서 블럭 한 조각으로 전락한 인격과, 그 인격이 어떻게 유린되고 살해당하는지에 대한 다큐멘터리와도 같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 참호전은 그 참혹함으로 유명합니다. 고작 몇 백미터의 전진을 위해 수백만 젊은이들의 생명이 갈려나갔죠. 1차 세계대전에서 발생한 1700만명의 사망자 중, 300만명의 사망자가 이 서부전선에서 나옵니다. 

 

 

군인은 전쟁 속에서 기계보다 못한 도구로 전락합니다. 군복의 색깔이 다르면 심장에 칼을 꽂고, 총을 쏩니다. 단지 그 뿐입니다. 그 자리, 그 순간만큼은 국가를 지킨다는 숭고한 목적도, 가족이 기다리고 있다는 감정도 떠올릴 수 없습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발악.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순간들이 전쟁의 진실일 뿐입니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렇게 느낄 것입니다. 

 

전쟁을 말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확전'을 각오한다느니, '선제타격'을 한다느니, '일전불사'를 각오한다느니. 그런 말들은 안전한 후방에서 나이프로 고기를 써는, 영화 속 독일군 사령관 같은 사람들의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전방에서 포탄을 맞고 살점으로 변하는 병사들에게 국가의 영광과 군인의 긍지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개인을 한낱 도구나 소모품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전쟁의 비극이 있습니다. 이는 병사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한, 사망한 병사들의 옷을 수선하던 여성들은 과연 그 옷이 어디에서 온 건지 몰랐을까요. 그들이 수선한 옷이 이내 다시금 전장에서 산산히 찢겨 피로 물들 것임을 몰랐을까요. 전장에서 피 흘리고 쓰러지는 이들이 남편과 자식과 오빠임을 몰랐을까요. 영화는 그 모든 비극들을 담담히 수채화처럼, 최소한의 서사와 사실적인 비참함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만, 특히 전쟁에 가장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는 동아시아 한 구석 반도의 우리들은 더더욱 절실하게 전쟁의 무용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계 최대의 화력이 집결한 곳에서 전쟁은 곧 파멸과 동의어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의 참상은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년도 더 전에 지구 반대편에서 희생된 군인들의 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서늘한 교훈을 줍니다. 전쟁을 잊어가는 세대들을 깨우기 위해서라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년 전 만들어진 원작의 의도는 아직 생생하게 우리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728x90
반응형
BI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