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나온 뒤로 극장에서의 영화관람은 아주 특별한 이벤트가 되어버렸습니다. 당연히 한산 같은 영화도 영화관에서 볼 기회를 놓쳤죠. 그러던 중에 넷플릭스에서 익숙한 포스터가 보이는데 제목이 뭔가 다릅니다. 한산 '리덕스'라고 하길래 넷플릭스에서 따로 만든 시리즈인가 싶었는데 알고보니 감독판이더군요. 굳이 이런 생소한 단어를 쓰는 것도 일종의 마케팅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래도 궁금한 단어는 한 번 더 보게 되니까요.
개인적으로 전 전작 '명량'을 그리 재미있게 보지 못했습니다. 초반이 지나치게 무거웠고 민족과 역사라는 당위에 짓눌리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감독의 무거운 어깨를 관객이 함께 짊어지는 느낌이랄까요. 후반 해전이 대단했다지만 그 와중에도 부분부분 신파스러운 장면들이 집중력을 깨뜨렸던 게 아직도 기억납니다.
이제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시점의 한산은 정말 괜찮은 영화로 돌아왔습니다. 감독판이라서 원작보다 20분 이상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크게 어색함없이 집중력을 잃지 않고 볼 수 있었습니다. 뭐 거창한 감상이 필요한가요. 2시간 반동안 집중력 잃지 않고 볼 수 있으면 정말 괜찮은 영화인 겁니다.
#다 알고도 놓을 수 없는 것들
한산의 결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전국민이 초등학생 때 다 알게 되는 역사적 사실에 어떤 카타르시스를 입혀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낼지가 관건이겠죠. 한산은 그 시대속으로 완전히 들어가버리는 선택을 합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당연하게도) 앞으로의 전쟁이 어떻게 흘러갈 지 알 수 없습니다. 임금은 평양까지 버리고 의주까지 몽진을 간 상황. 결전을 치러야 하는 조선의 장수들은 흔들립니다. 임금이 한 발자국 더 건너 명나라로 망명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국가가 사라지고 명예로운 전쟁은 개죽음으로 끝나버릴 상황입니다.
이에 맞선 일본은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와키자카는 조선을 넘어 명나라로 가는 꿈을 꿉니다. 사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아얘 허황된 꿈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와키자카는 조선 수군을 무너뜨리고 텐진으로 향해 명나라를 무너뜨리려는 꿈을 꿉니다. 가토에게 전라도를 양보하면서까지 말이죠.
이런 지점에서 영화는 정해진 결말이라는 짐을 짊어지고서도 생동감을 획득하는데에 성공합니다. 너무나도 뻔한 결말을 아는 입장에선 이런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오히려 신선해보이죠. 원균의 트롤짓도 어느정도의 합리성을 획득함과 동시에 극에 있어 긴장감을 더하는 역할을 합니다. 학익진이 완성되어야 하는데 한쪽 날개가 자꾸 삐걱대면 아무리 결말을 알고 본다고 한들 보는 사람이 불안하기 딱 좋지 않겠습니까.
#와키자카의 존재감
사실 임진왜란의 수전들이 이순신이라는 세 글자로 모두 정리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서사이며 그 흥행을 위해서는 이순신의 대척점이 필요한 게 사실입니다. 매번 지더라도 배트맨에겐 조커가 필요한 것 처럼요. 변요한의 와키자카는 이런 감독과 관객의 니즈를 120% 충족시켜줍니다. 현실은 압도적인 패전으로 난파당해 미역으로 연명하다가 아사 직전에 구조당한 장수일지언정, 영화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열연으로 이순신의 아우라에 범접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개인적으로 명량과 가장 다른 점이자 가장 나은 지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려 이순신이란 군신(軍神)에 대적하는 아우라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는 거죠.
#다소 아쉬운 이순신
거의 완벽했던 카운터파트와는 다르게 박해일의 이순신은 뭔가 심심한 감이 있습니다. 절망의 안개속에 싸인 전황의 중심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절제와 침묵을 놓지 않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압도적인 승리 후에도 영화 전반을 정리해주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명량을 생각하면 다소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죠. 전체적인 만듦새는 한산이 훨씬 좋지만 이순신이라는 성웅이 마지막에 던지는 묵직한 존재감이란 부분에서는 다소 부족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전쟁은 무엇이었나.', '앞으로 우리의 길은 이것이다.'에 대한 속시원한 마무리가 없습니다. '의와 불의의 싸움'이라는 메시지는 분명하지만 이 메시지를 이순신이 던지는 모양새는 아니죠. 이순신의 영웅화라는, 쉽고 뻔한 길을 경계한 제작진의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영화 마지막에서는, 모두가 아는 그 맛을 뿌려줬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은 있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장점이 단점을 분명히 상회하는 영화입니다. 한국영화 역대 최대 관객을 모은 '명량'보다 오락적으로도 작품적으로 훌륭합니다. 게다가 리덕스 버전에는 '노량:죽음의 바다'의 티저 예고편도 있으니 이 프랜차이즈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확인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지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화면을 뚫고 나오는 백윤식 님의 카리스마를 보면 '노량' 또한 만만치 않은 악역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줄 것 같습니다.
PS> 이 작품은, 대배우 안성기 님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 또한 깊습니다. 병마 속에서도 열연을 펼친 안성기님의 열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부디 쾌유하시어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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