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의 초대로 연극 하나를 보고 왔습니다. 연극 이름이 '6월 26일' 이었는데요. 좀 이상했습니다. 연극 정보를 좀 찾아보려고 온갖 검색엔진을 다 뒤져도 나오질 않는 겁니다. 9월에 대구에서 했던 연극 정보만 좀 나올 뿐 이번에 춘천에서 하는 연극은 어떤 정보도 찾을 수가 없었죠.
연극 이름에서부터 대충 느낌이 옵니다. 연극 제목 '6월 26일'은 한국전쟁 다음 날이죠. 아마도 동족상잔의 비극을 표현한 연극이구나 싶긴 한데 이런 소재는 사실 많이 익숙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기대보다는 괜찮을까? 싶은 마음이 더 앞섰던 것 같습니다. 제대로 홍보도 되지 않는 것 같아서 느낌이 더 좋지 않았죠. 하지만 2인극이고 지인이 그 중 한 명으로 나오는 연극이라 놓칠 순 없었습니다.
ITX를 타고 춘천의 공연장으로 향합니다.
이런 정보도 공연장이나 와서 처음 보게 되네요. 수상 내역을 보면 무척 내공있어보이는 연극 같습니다. 보고 나니 홍보가 더 적극적으로 되었으면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정말 매력적인 연극이었거든요.
연극의 시작은 일제강점기 전쟁터로 끌려온 두 청년의 모습을 비추며 시작합니다. 한 명은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두고 끌려온 청년이었고, 또 한 명은 글도 읽을 줄 모르고 끌려온 거지입니다. 그 둘은 일본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러시아에서 포로가 되어 러시아 군으로 끌려갔다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노르망디까지 가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둘은 6월 26일 춘천 전투에서 재회하게 되죠. 서로 바라지 않던 모습으로요.
이런 시놉을 보면 이 연극이 무척 고루해보입니다. 우리가 학생 때 지루하게 배웠던 역사 이야기 같아서죠. 하지만 이 연극은 이 역사를 완전히 개인의 영역으로 치환합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에 휘말려 산산조각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1시간 반 내내 무대를 지배합니다. 간간히 유머러스한 장면도 있지만 무대를 휘감는 건 시종일관 처절하고 잔혹한 현실입니다. 수용소에서 벌레와 쥐를 잡아먹고, 유일한 보물이었던 어머니의 편지를 스스로 찢게 되고, 절망에 짓눌려 자살까지 시도하는 장면들은 우리가 지나온 역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비참함의 연속입니다.
이런 몰입을 가능하게 하는 건 단 2명의 배우가 선사하는 열연입니다. 연극은 조명과 약간의 소품 외에는 어떤 장치도 없이 온전히 두 배우의 연기에 의존해서 흘러갑니다. 보면서도 정말 보통이 아니겠다 싶더군요. 극한 상황이 계속되는 각본 상 감정을 최대치로 올렸다 다시 내렸다 해야 하는데 이걸 실시간으로 눈 앞에서 보고 있으니 정말 감탄하게 됩니다. 울고 절규하고 발광하고 흐느끼는 극한의 감정들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흘러들어옵니다.
정규 교육 과정을 거친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무차별적으로 징병이 이루어진 것도, 많은 여성들이 위안부로 끌려간 것도, 수많은 동포들이 만주로 사할린으로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것도, 나중에 돌아와서도 정체성을 의심받은 사실도, 천신만고 돌아온 조국에서도 둘로 갈라져 총부리를 겨눈 것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죠. 머리로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가슴으로 이해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저 달달 외워서 시험문제의 답을 고르면 되는 그정도 지식이거나 스포츠 경기에서나 발현되는, 일본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 정도로만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연극을 보면 순식간에 그 때로 돌아가 그 감정을 고스란히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 연극이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적 관점을 보이는 건 아닙니다. 역사적 배경을 빌렸을 뿐, 철저히 개인의 입장에서 개인의 감정을 그렸기 때문에 더 절절하게 와 닿는 면이 있습니다. 오히려 역사나 국가 같은 건 주인공들에게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그저 가족을 다시 보고 싶고, 살아서 돌아가고 싶을 뿐이죠.
일본군으로, 소련군으로, 독일군으로, 그리고 남한군과 북한군으로. 그렇게 비참한 생을 끝내 치열하게 지켜오다가 주인공이 마지막에 외치는 한 마디. '엄마 보러 가자!'는 대사에 저절로 눈물이 고입니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왜 이리 가슴이 울리는 걸까요.
우리는 계속 그 때 그 시절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요즘 청소년들도 우리와 똑같은 역사를 공부하고 있겠죠. 하지만 그들도 똑같을 것입니다. 그저 더 많은 연도와 사실을 외워서 더 많은 문제를 맞히고자 하겠죠. 역사를 가슴으로 만나는 기회라는 점에서 이 연극은 정말 소중한 시도입니다. 어떤 이데올로기에 부역하는 것이 아닌, 역사 속 인간의 존엄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더더욱 소중하죠. 이렇게 춘천의 작은 공연장에서 끝날 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연극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교육부 관계자들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와 지금의 가슴이 닿는 경험은 정말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소중한 기회니까요. 저 같은 어른들이 봐도 감동적인 연극이지만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더욱 큰 울림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대학로나 서울의 큰 공연장에서, 혹은 지역 순회 공연을 통해 더 많은 젊은 사람들이 이 연극을 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과과정에 등록되어 중고등학생들의 필수 관람 연극이 되어도 좋겠지요. 악착같이 검색해도 눈에 띄지 않는 이런 방식의 공연이 아니라요.
그만큼 혼자 보고 감동하기 아쉬운 연극이었습니다. 다음에 좋은 기회로 또 만났으면 싶네요. 나중에 우연히라도 이 공연을 만나게 된다면 꼭 한 번 경험해보시라고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보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대가 된 바다, 무덤이 된 바다 - 한산 리덕스 (0) | 2022.12.15 |
---|---|
내려놓아야 보이는 무언가 - 먹을텐데(Feat. 성시경) (0) | 2022.12.13 |
소개하고픈 유튜버 - 이연 (0) | 2022.11.09 |
진짜 '큰'게 왔다 - 블랙 아담 노스포 리뷰 (0) | 2022.10.22 |
내멋대로 비 신곡 안무 창작 미션 TOP 2 - 스트릿맨파이터 (0) | 2022.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