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회사에서 운영하는 숙소가 있어서 제주도를 오면 종종 이도이동 이라는 곳에 갑니다. 올 때마다 살짝 기묘한 느낌이 드는 동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데요. 언뜻 보기엔 신도시 주변에 보이는 단독주택단지 같다는 느낌이 들긴한데 뭔가 부촌의 냄새가 납니다. 엄청난 대저택들도 쉽게 볼 수 있고 소위 느낌있는 음식점들과 카페들도 듬성듬성 심겨있습니다. 뭔가 일본여행가서 우연히 만난 부자 동네 같은 느낌도 들어요. 예전에 연애할 때만 해도 주변이 꽤 한산했는데 아이 둘 낳고 키우는 지금 오니 인프라들도 많이 생기고 발전이 된 모습이네요.
제주도에 모처럼 갔는데 비는 오고 추적추적 꿉꿉했던 어느날. 길을 나서기 전에 근처에서 브런치를 먹기로 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냥 대충 동네 검색하다가 눈에 띈 카페가 어반르토아였습니다.
아이들이 생기고 나서는 잘 가지도 못하지만 어쩌다가 이런 '느낌있는' 곳을 아이들과 갈때면 부담이 생기는 게 사실입니다. 주변에 있는 젊은 손님들에게 민폐가 아닐까 싶은 걱정도 있고, 주인이 우리같은 가족단위 손님들을 싫어하면 어쩌나 싶기도 하죠. 대놓고 노키즈존 걸어놓는 카페들도 요즘엔 꽤 되고 말이죠.
그런데 이 카페는 입구에서부터 그런 걱정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입구에 배치된,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이 들어있는 자판기와 치매안심가맹점 명패는 이 카페의 주인이 어떤 마음으로 이 카페를 운영하고 돈을 버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합니다.
카페는 주변 동네 분위기와 잘 어울리게 무척 세련되고 깨끗합니다. 연애할 땐 이런 곳을 많이 왔었는데 옛날 생각도 나고 그랬네요. 자리를 잡고 커피와 브런치 메뉴를 고릅니다. 원두도 고를 수 있으니 골라먹는 맛도 있네요. 브런치 메뉴는 스텝 오믈렛과 프렌치 토스트를 골랐습니다.
휴대전화로 아이들의 시선을 애써 돌리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려고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 뜻대로 되지만은 않습니다. 21개월 둘째의 땡깡이 시작된 것입니다. 브런치 메뉴에 나온 포도알이 떨어지자 냉큼 더 내놓으라며 짜증을 내는 것이죠. 평소에 워낙에 과일을 좋아하는 둘째라 다른 음식도 거들떠 보지않고 우는데 참 난감하더군요. 메뉴에 추가 과일 메뉴만 있어도 당장 주문하는 건데 그런게 있을리도 만무하고, 그렇다고 따로 달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되니. 이래저래 곤란했습니다. 주변 손님들을 불편하게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고요.
다 먹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나가야하나 싶던 그 때, 점원분이 플라스틱 컵에 포도알만 담아서 스윽 내밀었습니다. 뒤에서 다 지켜보고 있던거죠. 그때 정말 어찌나 고맙던지. 말로 표현 못할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포도알을 만나자 금새 조용해진 둘째는 다시 평온을 되찾고, 우리 가족의 시간도 다시 돌아왔습니다.
브런치도 정말 수준급으로 맛있었습니다. 부들부들한 오믈렛과 바삭하게 구운 바게뜨 빵은 마치 사이좋은 형제마냥 입 속에서 어울렸고, 달콤하게 구운 프렌치 토스트에 짭쪼름한 생햄, 고소하고 담백한 부라타 치즈의 조합은 정말 고급지더군요. 커피맛도 무척 훌륭해서 애들만 아니면 한 잔씩 더 시켜서 시간을 보내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사실 저희는 누가봐도 뜨네기 관광객들이고 한 번 오면 다시 언제올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인데. 마치 동네 단골 카페에 온 듯한 편안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쁘고 트렌디한 카페는 제주에 넘쳐나죠. 델문도라는 유명한 카페도 가봤지만 저는 솔직히 여기가 훨씬 낫더군요. 그리 길게 있진 못했지만 언젠가는 꼭 다시 와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카페였습니다.
부디 그날까지 이 자리에서 번창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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