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공룡 둘리가 개봉하고, 타이타닉이 극장에 걸리며 슬램덩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 문장만 보면 어디 한 20년 전 얘긴가 싶겠지요. 믿기 힘들게도 2023년의 풍경입니다. 세상 아래 새로운 건 없다지만 그래도 요즘은 너무 몸을 사리는 기분이 듭니다. (위에서 예를 든 작품들과는 별개로) 안전한 기획들이, 겁많은 돈을 모아, 손해는 보지 않을 방향으로 갑니다. 경제력이 커진 세대들의 추억을 인질로 삼는 거죠. 요즘 리메이크 곡들이 많은 것도 그런 현상의 일종일 겁니다.
그렇지만 과거의 명작들 중에서도 정말 건드리기 힘든 것들이 있습니다. 예컨데 '슬램덩크' 같은 작품입니다. 96년에 마지막 회를 낸 이후 그 어떤 매체로도 리메이크나 그 이후의 이야기가 다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작가 스스로 기념일 마다 작은 에피소드들을 풀긴 했지만 북산고교의 불꽃은 96년 마지막 화 그날에 멈춰 있었죠.
보통 20년 이상 이렇게 묵힌 명작들은 다시 꺼내기가 오히려 어렵습니다. 추억은 시간을 타고 내려오는 눈덩이와도 같아서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팬들의 머리 속에서, 마음 속에서 과대포장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커진 추억의 이자를 제대로 돌려내주지 못한다면 그 무게에 깔리는 건 제작자 본인이 되겠죠. 희대의 히트작인만큼 리스크 또한 그에 비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슬램덩크는 다릅니다. 무려 원작자 다케히코 이노우에가 직접 감독을 맡았습니다. 배경은 슬램덩크 최고의 에피소드로 꼽히는 산왕전. 그리고 주인공은 무려 '송태섭'입니다. 여기서부터 제작진의 '단호한 각오'가 느껴집니다. 본인이나 제작자가 자신이 없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할리우드 문법으로 접근하자면 능남과의 연습경기를 1편으로, 해남대부속고와의 조별리그 경기를 2편으로, 그리고 대망의 산왕전이 3편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주인공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강백호죠. 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이보다 적합한 구성이 또 있을까요. 방구석 올드팬의 머리에서도 3부작까지의 그림이 착착착 그려지는데 제작사와 작가의 선택은 전혀 달랐습니다. 게다가 주인공이 상대적으로 마이너한 '송태섭' 이라니. 영화를 보기 전까진 이 부분이 참 기묘하고 불안하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기대 또한 분명했죠. 대체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있을지에 대한 기대입니다.
기술적으로 이 극장판은 완벽합니다. 산왕전을 리얼타임 바스켓볼로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작품은 원작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걸 보고 눈물 흘리지 않고서 누가 감히 슬램덩크 팬을 자처할 수 있을까요. 만화 책에서만 기억되던 장면들이 살아 움직이는 광경은 기술이 왜 존재하는지, 인간은 왜 발전하는지에 대한 명제의 해답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송태섭'은 좀 애매합니다. 경기가 좀 볼만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회상장면이 관객들의 아드레날린을 끊습니다. 그 때마다 만화책에선 나오지 않는 송태섭의 이야기가 조명됩니다. 26년만에 추가된 오리지널 스토리라는 점에서 환영할만 하지만 왜 송태섭일까에 대한 의문은 영화를 보는 내내 가시처럼 입안에 남습니다.
새로 추가된 송태섭의 이야기의 톤앤매너도 원작과 어울린다고 보기 힘듭니다. 슬램덩크는 작가가 29살까지 그린 작품이고, 지금의 작가는 어느덧 50 중반을 넘겼습니다. 그동안 작가는 '베가본드'와 '리얼'을 그렸죠. 두 작품 모두 슬램덩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작품입니다. 그들만의 무거운 사연이 있어도 어떻게든 우당탕탕 유쾌하게 그렸던 20대의 슬램덩크와는 달리, 작가의 최근 작품들은 주인공들의 무거운 사연을 그저 하하 호호 웃으면서 넘기지 않습니다.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돌파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이 슬램덩크 극장판에서는 20대의 작가와 50대의 작가가 충돌합니다. 극장판을 보며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옵니다. 자식같은 캐릭터들의 아픈 시간들을 묻어버리기에 작가는 업계의 거물이 됐고 힘도 세졌습니다. 게다가 송태섭은 주인공들 중에서도 비중이 약한 편이라서 이노우에의 아픈 손가락이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말하면 입 아픈 북산의 대들보 채치수, 천재 에이스 서태웅, 방황의 서사를 부여받은 정대만, 미친 성장을 보여주는 주인공 강백호에 비하면 원작 내 송태섭의 비중은 다소 미약해 보입니다. 하다못해 안경선배도 식스맨으로서의 서사가 있는데 송태섭 하면 딱히 생각나는 굵은 이야기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극장판에서의 송태섭은 작가가 슬램덩크에서 보여주지 못한 진짜 비하인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화려한 기술로 부활시킨 산왕전이 미끼에 불과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이 극장판의 편집은 흥행을 위한 편집이 아닙니다. 흥행성적을 생각하면 이렇게 관객의 몰입을 끊는 편집을 할 순 없어요. 그것도 최고의 컨텐츠인 산왕전을 대상으로 말이죠. 당장 어디 유튜브 편집자 아무나 불러와도 이보다 훨씬 가슴 떨리는 편집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산왕전은 그런 컨텐츠니까요.
그렇지만 팬들의 마음을 울리는 지점 또한 여기에서 온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극장판 한 편으로 볼 때는 몰입감을 해치는 편집으로 느껴질지언정, 슬램덩크라는 작품의 전체로 봤을 땐 숨겨진 지도의 한 켠이 환하게 밝혀진 것입니다. 26년 동안 알지 못했던 송태섭이라는 캐릭터의 비밀이 드러난 것이죠. 이노우에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그의 안에서 슬램덩크의 캐릭터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오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이노우에의 머리 속에서만 성장해왔던 새로운 이야기의 한 켠이 드러난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극장판의 가치는 수치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집니다.
게다가 이 극장판의 이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The First Slamdunk'. 첫번째라는 단어에는 두번째도, 세번째도 기약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흥행도 나올만큼 나왔으니 2편, 3편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죠. 하루하루 늙어가는 아저씨 아줌마들에게 오늘을 살아갈 작은 힘이 더해졌다고 하면 조금 과장이 될까요. 다음 극장판에서는 슬램덩크의 어떤 숨겨진 지도가 나타나게 될지. 벌써부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됩니다.
대체 누가 끝까지 읽을까 싶을 정도로 주절주절 썼지만 사실 이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왓챠에서 본 '석미인' 님의 한줄평입니다.
"첫사랑에게 4.5를 주는 바보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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