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 쯤이면 회사 부서별로 추계단합대회를 하라고 공지가 내려옵니다. 보통은 주변 신도시 상권에서 대충 맛있는 점심 먹고 일찌감치 헤어지는 편인데 저희 부서는 좀 이상한 결론이 났어요. 인천 끝자락에 있는 회사가 난데없이 서울로 함 가자는 얘기가 나온거죠. 카톡으로 부서원들 투표를 돌리는데 설마 가겠나 싶더니만 정말로 서울로 가버리게 됐습니다. 그것도 청와대로요.
내후년에 퇴직하시는 부장님의 의중이 꽤 강력했습니다. 그 정도 연배되시는 분들에게 청와대 관람이란 어떤 각별한 의미가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들더군요. 그런데 실제로 가보니 정말 60-70대 분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더군요. 권위주의 시대를 온몸으로 받아내신 분들에게 청와대는 그야말로 '호기심 천국'이 아니었을까요.
광화문역 2번 출구에서 1번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이면 청와대 앞에 도착을 합니다. 사실 청와대 근처는 서울 살 때 많이 놀러왔었는데(서촌, 광화문, 인사동 등) 청와대 앞은 처음이었습니다. 늘 시위가 있었고, 경찰들이 길목마다 살벌하게 상주해 있어서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날 찾은 청와대는 놀랍게도 한산했습니다. 지켜야 할 게 사라진 청와대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더군요.
아침 9시가 넘어가니 슬슬 대형 관광버스들이 속속 도착하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깃발 관광을 하는 외국인들도 종종 보였지만 대부분은 버스를 대절하고 올라온 지방의 어르신들이었습니다. 꽤 먼 곳에서 올라오신 분들이 많았고 연배도 최소 70대부터 시작할 정도로 어르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평일에도 꽤 북적이더군요. 청와대가 개방된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이 정도면 초반에는 좀 혼잡했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청와대를 방문하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합니다. 시간대별로 방문할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거든요. 혼잡을 피하기 위한 방편일 것입니다. https://reserve1.opencheongwadae.kr/ 여기서 간단히 예약할 수 있습니다. 일단 입구에서 예약 QR코드를 체크하고 입장이 이뤄집니다.
입장하면 팜플렛이 비치되어 있는데 간단한 동선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영빈관을 시작으로 청와대 관람이 시작되었습니다. 소감은... 신기하긴 하지만 딱히 그렇게 화려하다거나 대단한 느낌이 들지는 않더군요. 사실 가장 큰 감상은 '오래됐네' 였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지어진 지 30년이 넘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오래된 감상이 낡았다는 인상이 30%라면 그래도 중후하다는 인상이 70%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오래됐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힘드네요.
앞서서 '오래됐다'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 한 국가를 대표하는 건축물로서는 당연한 인상이어야 할 것입니다. 뭐 우리나라가 갑자기 생긴 신생국가도 아니니까요. 영국이나 프랑스같은 유럽 국가들이나 역사가 짧은 미국을 봐도 수십 수백년 이상 된 건물을 아직도 국가수반의 집무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걸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유서 깊은 이런 공간을 너무 쉽게 포기한 것이 아닌가 싶어 아쉬움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개방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지금이라도 바로 다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영빈관을 지나 우리가 늘 보아왔던 익숙한 전경을 마주칩니다. TV에서 보던 광경과 비교하면 뭐랄까. 좀 초라해지는 느낌이랄까요. 주변의 왁자지껄한 관람객들을 보고 있노라니 권위가 사라진 껍데기 공간이라는 느낌이 확 와닿습니다. 그래도 한 때 국가를 대표했던 근엄한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본관에 들어서자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이 눈에 띕니다. 이 중에서는 각자 인정하는 대통령이 있고, 인정할 수 없는 대통령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거기에 대한 컨센서스가 제대로 정립이 되어있지 않죠. 그래서 독재자임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중요 이슈마다 늘 현충원 참배의 대상이 되는 인물도 있고요. 국민들의 저항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대통령들도 초상으로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게 좀 의아한 점이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한 우리의 과오도 함께 전시한다는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아보이기도 합니다. '그래, 저 정도밖에 안되는 인물도 대통령으로 뽑았었지' 라고 두고두고 반성하게 만드는 그런 의미라면요.
제법 서두르면 1시간 이내에도 가능한 코스였고 구석구석 정말 꼼꼼하게 돌아봐도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은 코스였습니다. 특이한 점은 언제라도 다시 본래의 기능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만 개방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 정도만 개방한 수준이랄까요. 청와대 개방이 충분한 여론 수렴없이 급박하게 진행된 만큼 정권이 바뀌게 되면 다시 활용하게 될 경우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정도의 공간을 단순 관광자원으로 소모하는 건 좀 낭비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국빈 만찬 장소로 마땅한 곳이 없어 국립중앙박물관이 언급되고 대통령실 이전과 새 관저에 들어가는 막대한 예산을 돌아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건 잘 관리된 조경이었습니다. 때마침 깊어가는 가을이었던지라 조경의 아름다움이 더욱 눈에 들어왔던 것 같네요. 오랜 시간을 머금고 잘 자란 풀과 나무들은 이 공간이 국가를 대표하던 공간이었던 시절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전보다는 초라해진 이 공간에서 그들만은 자부심을 지키며 꼿꼿하게 서 있는 느낌이랄까요.
개인적으로는 이 날의 관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아직 관광자원으로 쓰기에는 무척 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마 여기를 둘러본 많은 분들의 마음도 그러할 거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과를 아쉽게 하는 과정 - 한국 VS 우루과이 (1) | 2022.11.25 |
---|---|
절실한 자가 이긴다 - 독일 VS 일본 (1) | 2022.11.24 |
비움이라는 가치 (0) | 2022.11.08 |
살아있는 우리는 그저 운이 좋은 걸지도 모릅니다 (0) | 2022.10.30 |
조빈, 이 인물의 위대함에 대하여 (1) | 2022.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