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은 오래된 독재자입니다. 2000년부터 임기를 시작해서 2008-2012년 기간의 총리 시절을 제외하고는 (이때도 사실상의 1인자였지만) 러시아의 1인자는 항상 푸틴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작금의 전쟁을 예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겁니다. 그저 블러핑으로 끝내거나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는 시도 정도로 많이들 생각했죠. 하지만 결국 전쟁은 일어났고 양국 국민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사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독재국가는 독재자 1인의 의지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독재국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재자 1인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책 한 권을 준비해왔습니다. 푸틴을 이해하기 위한 그래픽 논픽션입니다.
일단 만화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책이다보니 읽는데 그렇게 큰 부담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낯선 나라와 베일에 싸인 독재자를 이해하는데에는 최적의 형식이 아닐까 싶네요. 책은 푸틴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통치자가 되었는지, 외부로 투사하는 남성적이고 강인한 이미지 뒤에 어떤 모습이 숨겨져 있는지를 폭로합니다.
디테일은 다르지만 독재자란 인간들은 대부분 비슷한 결을 가집니다. 하나같이 잔혹하고 국민들을 자신의 수단으로 삼으며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주변을 의심하고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려 폭력을 전시합니다. 하지만 푸틴정도면 상당히 영리한 편이라고 할까요.
그는 유럽을 안심시키고 유럽을 러시아의 에너지에 종속시키는데에 성공합니다. 방대한 천연자원을 개발하여 이끌어낸 러시아의 경제성장은 그의 장기집권을 돕는 발판이기도 했죠. 푸틴의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고, 브렉시트 국면에서 방대한 SNS 여론전을 벌여 유럽의 분열을 획책하고 끝내 영국의 EU 탈퇴를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들의 장학생으로 길러진(혐의를 받는) 트럼프를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에 이릅니다. 물론 일부는 작가가 주장하는 혐의에 불과하지만 이 책은 그 혐의에 대한 논리를 꽤 설득적으로 전개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국제뉴스로 접하는 푸틴의 모습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교활하며 탐욕적인 면모를 볼 수 있죠.
하지만 그 반대의 모습 또한 존재합니다. 임기 후 얼마 안돼 터진 핵잠수함 쿠르스크 침몰 사건에서 유족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고 충격을 받거나, 코로나19 창궐 이후 그만의 공간에 틀어박혀 2020년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도 했죠. 이런 푸틴의 유약함은 그가 투사하는 공포로 증명됩니다. 그에게 반기를 드는 언론인, 시민운동가, 정치인들은 여지없이 처참하게 암살당합니다. 총, 방사선, 독극물 등등 다양한 수단으로 공포를 심습니다. 20년이 넘는 집권기간 동안 꾸준히 반대자들을 숙청해온 나머지 이제 그에게 반기를 들 내부의 힘이 너무 약해져 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입니다. 뭐가 튀어나왔다 싶으면 망치로 사정없이 쳐대니 쉬운 일은 아닐겁니다.
이런 푸틴의 부상은 유럽과 미국의 무관심과 방심 속에 이루어집니다. 러시아가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고,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을 병합하고, 말레이시아 여객기를 격추하고, 천연가스를 무기화하는 과정에서 어떤 국제기구나 국가도 효과적으로 제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트럼프 대통령 임기기간은 결정적이었죠. 이 시기에 서유럽과 중동에 대한 중대한 군사적 행동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소극적인 경제 제재로 사실상의 침략을 묵인하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야금야금 간을 보던 푸틴의 결정적인 오판을 이끌었다는 거죠.
20년이 넘게 소중한 권력을 쥐고 놓지 않으려 발버둥 친 그는 이제 늙고 노쇠하기까지 합니다. 그의 판단히 흐려졌다는 건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독재기간동안 조용히 썩어온 러시아는 그 국력을 빠르게 소진하는 중입니다. 부패한 군대는 명분없는 전쟁을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지는 중이죠. 최근의 대대적인 탄도미사일 폭격이 러시아 내 강경파에게 휘둘린 결정이라는 분석 또한 푸틴의 인지능력이 예전같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 왜 푸틴이 이 전쟁을 결심했고 이 전쟁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전쟁은 어떤 치밀한 노림수나 대단한 야망으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겁쟁이 독재자의 오판에 불과하죠. 이제 22년동안 꽁꽁 숨겨왔던 신화의 장막이 벗겨질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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