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곳이 플랜트 계열이고 설비감독을 맡다보니 비정기적으로 자질구레한 작업들이 많습니다. 1년에 한 번씩 크게 오버홀도 있구요. 그러다보니 수많은 업체들을 만납니다. 구매업체도 있고 용역업체도 있고 정비업체도 있습니다.
항상 예측가능한 스케줄로만 일이 흘러간다면야 뭔 걱정이 있겠냐마는 기계들도 사람처럼 예측불가능한 상황에 빠지기 일쑤입니다. 갑자기 외부기관에서 수검이라도 나온다고 하면 급하게 안전시설을 보강해야하는 때도 있죠.
지난주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안전관련 수검이 코앞인데 보강하지 않으면 크게 지적받을 만한 곳이 발견됐거든요. 수검은 내일이고 발견 시간은 오전 11시. 당일 오후 내로 작업을 무조건 마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정석적으로 해결하려면 무조건 용접이 필요한 작업이라서 업체 수배하고 화기작업 관련 안전 허가 올리고 이것저것 절차 밟으려면 못해도 하루는 더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장 업체를 수배하는 것 자체가 큰일이었습니다.
보통 이정도로 스케줄이 화급한 일이 들어오면 업체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립니다.
첫번째 타입은
온갖 생색을 다 내면서 무척 곤란하지만 감독님 봐서 이번만큼만은 해주겠다는 타입. 갑과 을이 바뀌는 상황이 되죠.
두번째 타입은
죄송하지만 그 시간에는 어려울 것 같다며 완곡하게 거절하는 타입이 있습니다. 솔직히 스케줄이 너무 타이트했죠.
사실 생색이든 뭐든 일단 업체부터 구하는 게 최우선이라 저희 현장에 자주 들어오는, 저도 몇 번 써본 업체에게 먼저 연락을 해 봤습니다. 그런데 상황을 설명하니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돌아오더군요.
그렇게 급할 때 저희를 먼저 떠올려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감독님. 지금 바로 현장에서 뵙겠습니다.
순간 뭔가 얻어맞은 듯 한 충격이 오더군요. 단가가 비싼 편임에도 불구하고 타 부서 감독들에게 호평이 자자한 업체인데 그 이유를 본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그 사장은 반나절만에 용접 작업 없이 가능하다면서 제가 생각지도 못한 해결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타 작업장에 있던 인부들까지 급하게 수배해서 세 시간만에 작업을 깔끔하게 완료했습니다. 덕분에 다음날 수검도 별탈없이 넘어갈 수 있었죠.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이 업체에게 충격을 받은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예전에 이 업체와 일을 하면서 단가를 꽤 크게 깎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케줄이 단축되면서 공임이 줄었기 때문이지만 업체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업체는 꽤 까다로운 조건임에도 흔쾌히 제 제안을 받아들인 겁니다. 그것도 다른 현장에서의 인부들까지 뽑아내서 말이죠. 제가 앞으로 이 업체와 일을 하면서 쉽게 단가를 깎을 수 있을까요? 최소한 당분간 그러긴 힘들 것 같습니다.
그 정도 작업이야 사실 어느 영세업체라도 다 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특별히 엄청난 기술을 가지지 않더라도, 업계에서 가장 기억될 수 있는 방법을 그 사장은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영업을 위한 가면이든 진심이든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다른 업체와 완전히 차별화된 이미지를 구축했다는 게 중요한거죠. 그것도 돈 한푼 들이지 않구요.
저도 언젠가는 회사를 나와야 할 겁니다. 정년을 채우고 나오든 못 채우고 나오든 저만의 일을 할 날이 언젠가는 오겠죠. 언젠가 올지도 모를 그 날을 위해 이 업체를 기억해놔야 할 것 같습니다. 말 한마디로 자신을 각인시키는 그 비결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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